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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동락(與紙同樂) _ 종이와 함께하는 즐거움

종이는 그 어떤 것보다 사람들의 일상에 필요한 물건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고 사용한 후에는 쉽게 버려지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와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기(利器) 중에서도 종이만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준 물건도 없을 것이다.

 인류는 종이가 발명된 이후 그들의 역사와 생각을 온전하게 남길 수 있었다. 종이 위에 남겨진 과거의 기록은 후대에 이어져 인류의 정신과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종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무를 가공하여 만들었다.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했기에 우리 곁에 종이가 늘 함께할 수 있었다.

 <여지동락 – 종이와 함께하는 즐거움>은 옛 사람들이 종이와 함께한 시간을 기록하는 전시이다. 그 시간은 종이가 기록을 위한 매체를 넘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공예품으로까지 확대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시각 재료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한옥의 바닥재인 장판지와 병풍에서 영감을 받아 가변적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낸 지니서, 고서(古書)를 이용하여 기억과 역사를 담아낸 전광영, 올곧은 정신과 수신을 종이로 표출한 최병소・박서보, 한지의 물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조형 세계를 만들어 낸 이응노・권영우・정창섭의 작품은 종이가 작가에게 수용되어 새롭게 변용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종이, 기록을 담다


한지(韓紙)는 섬유질이 풍부한 닥나무로 만들어져 질기고 내구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한지의 뛰어난 품질은 종이를 발명한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우리나라는 우수한 한지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온전히 남아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록은 필사(筆寫)와 목판(木板) 등 다양한 인쇄 방식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책으로 남겨졌다. 책에는 역사와 사상 등 다양한 정신문화가 기록되었고 후대에 전승되었다. 정성을 들여 직접 베껴 쓴 각종 사경(寫經)과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각종 경전(經典)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우수한 인쇄기술뿐만 아니라 우수한 재질의 한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광영(1944~)의 한지 작품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한약방에서 보았던 한지로 만든 한약 주머니에서 시작된 작품에는 그의 어린 시절과 마음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고서를 사용한 그의 작품 속에는 그 고서를 거쳐 갔던 무수한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종이, 정신을 밝히다


고려 때 발명된 금속활자는 조선에 와서 크게 발전하였다. 금속활자를 사용하는 인쇄기술의 발전은 성리학의 사상을 담은 다양한 서적의 출판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을 움직인 유교 정신이 보급되고 정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제지기술의 발달과 국가 차원의 장려정책으로 인하여 종이의 생산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서적의 출판 이외에도 종이로 만든 각종 이기(利器)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양반 문인들의 생활공간에서 사용된 문방구와 가구에는 근검함을 중요시한 유교 정신이 깃들어있다. 종이공예품은 한지의 질감과 장점을 잘 활용하여 만들었다. 화려함을 피하고 검소함을 지향하면서 실용적인 기능을 담았다.

 최병소(1943~)의 신문지 작품은 억압된 사회에서 제 역할을 잃은 신문의 폐단을 드러낸다. 그는 신문 기사를 까맣게 지워내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서 올곧은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박서보(1931~)에게 작업 행위는 곧 수신(修身)이다. 그는 캔버스 대신 전통적인 재료인 한지를 사용하여 오랜 시간에 걸친 수신의 깊이를 작품에 쌓아간다.





종이, 생활 속에 스며들다


우리 곁에 늘 함께 한 종이는 문서와 서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사용하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한 장의 종이는 찢어지기 쉽다. 그러나 종이를 여러 장 붙이고, 종이를 꼬아 종이끈을 만든 후 엮거나, 종이를 찢어 물에 불려 풀과 섞으면 내구성이 좋아져 공예품의 재료로 손색이 없다.

 종이공예품은 사용자와 용도에 따라 지장(紙裝)・지승(紙繩)・지호(紙糊) 등 다양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지장 공예품은 두꺼운 종이나 나무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안팎으로 한지를 여러 겹 발라 만든 것으로 각종 함과 상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여성들이 사용한 바느질도구는 색지(色紙)로 꾸며서 화사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종이가 귀했기에 종이공예품을 만들 때 책이나 문서로 사용한 종이를 재활용하기도 하였다. 폐지를 사용한 지승・지호는 종이의 내구성을 보완하여 실용적인 공예품으로서 거듭났다.

 종이는 현대 작가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이다. 먹으로 선염한 화폭 위에 여러 종류의 종이를 붙이고 쌓아 올린 이응노(1904~1989), 한지를 찢고 뚫고 겹겹이 붙이는 권영우(1926~2013),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펼쳐 서서히 응고시키는 정창섭(1917~2011)의 작품은 한지 고유의 물성을 이해하고 작가 고유의 표현 기법을 통해 새로운 조형 세계를 만들어낸다. 종이의 수용과 변용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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